가끔보는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 Night Train to Lisbon, 2013)
mosa.
2014. 7. 1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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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사망한 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내가 죽은 후, 나에 대해 나의 사람들은 어떻게 말해줄까. 그런 걸 떠나서 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싶다. 기억 속에서 지워진 사람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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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어지러운 혼돈의 시기가 있다. 현재 다시 강하게 부딛히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도 그렇고. 이집트, 터키, 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정권에 반대한 시위도 일어난다. 영화 속에서 포르투칼 역시 살리자르 라는 독재자가 비밀경찰, 시민탄압 등의 전형적인 독재정치를 펼쳤고, 그에 대항하여 비밀경찰을 폭행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들이 나온다.
한국도 현재 움직이는 사람들은 움직이고, 그 움직임도 다양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라고 불릴 정도로, 대한제국-식민지 시대-독립-남북 분단-한국 전쟁-군부 독재정권-민주화 시위-IMF경제 위기까지, 모두 100년 안에 일어난 대한민국의 20세기.
나는 솔직히 과거의 사회의 산통을 간접적으로 듣고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니가 저 상황이었다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움직이니? 아니면 조용히 소시민 1인으로 살아가니. 촛불집회도 나가본 적 없는 나다. 2002년 월드컵의 거리응원, 대규모 응원 현장에도 간 적 없는 나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피와 상처를 각오하고 싸워서 이루어낸 것들에 숟가락만 얹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삶을 소중히하며 살아가면서 말이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나 같은 팔짱만 끼고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숟가락만 올리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100년이 넘는 투쟁의 역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고, 그리고 찾아온 (일단은)평화의 시대에 다시 그런 혼란을 소환하고 싶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난 더 이상 한국이 투쟁, 시위 등으로 정세가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의 삶이 너무나도 중요, 소중해졌고, 사회보다는 개인의 삶이 우선시되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사회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다. 너와 나, 우리, 그리고 사회-라는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나와 내 자식, 내 가족만 존재하는 건조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고, 사회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과 안타깝게도 '대립' 구조로 변하고 있다. 나는 양쪽 다 속하지 않은, 아니,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착각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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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나기' 혹은 '우연히 도착한 낯선 곳에 정착하기'는 누구나 한 번 쯤은 꿈은 꿔보지만 대부분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기도 하다. 주인공 레이몬드는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갑자기 훌쩍 떠나 며칠을 그곳에서 머문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그곳에서 만난 여자는 묻는다. "Why don't you just stay?"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내 인생과 삶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고.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그 계획만을 보고 달려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어느 날 예고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며칠 전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씨는 최종적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대외용으로 준비된 대답을 했다. "아시아로 돌아온다면 일본으로 가서 취직하고 싶어요."
나는 내가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직'인지 '이제는'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나는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불안하고 캄캄한 나의 앞날을 그저 '가능성'이라는 말로 연막작전을 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바랐다.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나기를-하고.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부터 나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생각해 보려고 해도 나의 머리는 바로 도피하기 때문에, 그 상황이 닥치지 않으면 모를 것 같다. 다만 그놈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만큼 아주 조금이라도 '가능'으로 바뀔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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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어보고 싶다.